위플래쉬 – 당신은 무엇에 순종하고 있는가

8월 8 • Movie & Culture • 104 Views • 위플래쉬 – 당신은 무엇에 순종하고 있는가에 댓글 닫힘

글 – 성지훈

미국 | 드라마 | 2015. 3. 12. | 15세 관람가 | 106분

 

영화의 마지막 장면부터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은 단언하건대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악의와 이상함으로 똘똘 뭉친 지휘자이자 교수인 플래처가 파놓은 치졸하고 저열한 함정에 걸려든 악의와 이상함으로 똘똘 뭉친 드러머이자 제자인 앤드류의 소름끼치는 화학작용. 이상하고 나쁜 놈들이 모여서 빚어낸 그 장면이 끔찍한 건 그 장면이 사뭇 감동스러워 보이는 까닭이다. <위플래쉬>가 흥행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잔혹한 장면을 보면서 ‘사제간의 정리(情理)’ 같은 말을 꺼냈다. “어쩌면 플래처 교수의 폭력적인 교육방식은 제자의 가능성을 끌어내기 위한 필요악일지 모른다.”면서. (실제로 <위플래쉬> 개봉 당시에 한 SNS에서 본 감상평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감상평에 동조했다.) ‘사랑의 매’로 ‘훈육’당한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들의 사회.
<위플래쉬>는 세계에서 영화 시장이 가장 큰 북미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가장 흥행했다. 워낙에 잘 만들어진 영화기 때문에 평단의 찬사를 받는 것이야 이상할 것 없지만, 감독도 배우도 생소한 이 저예산 영화가 한국에서만 유독 흥행을 기록한 것은 의아한 일이다. <위플래쉬>는 저예산 영화로는 드물게 158만 관객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웠다. 국내 저예산 영화들이 관객수가 1만명만 동원해도 ‘대박’이라는 평가를 받으니, <위플래쉬>의 흥행 성공은 그야말로 ‘초대박’이다.

#Commentary01  권위에 대한 굴종 – “당신들 친구 중엔 찰리 파커가 없잖아요”

주인공 앤드류는 다분히 종속적인 사람이다. 그는 무엇에 도전하는 법이 없다. 앤드류는 “왜 셰이퍼 대학에 다니느냐”고 묻는 여자친구 니콜에게 “셰이퍼가 최고의 음악학교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미식축구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사촌들에겐 “그래봤자 3부 리그에서 뛰고 있으니 절대 NFL에 갈 수는 없다”고 조롱한다. “평범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더라도 찰리 파커처럼 모두에게 회자되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 앤드류에게 가족들은 “친구들이 널 기억해 줄 것”이라고 조언하지만, 앤드류는 “당신들 친구 중엔 찰리 파커가 없잖아요.”라고 답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앤드류의 답은 언제나 ‘권위’를 성취하는 것이다. 미국 최고의 음악학교 셰이퍼에서도 플래처 교수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모든 학생들이 그가 지휘하는 밴드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 밴드를 거치면 뉴욕필하모닉이 있는 링컨 센터 무대로 직행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다. 하여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권위가 발생하는지 지켜보면 그 사회를 움직이는 ‘욕망’을 알 수 있게 된다. 폭언과 폭력이라는 플래처 교수의 교육법이 권위를 인정받는 것은 그가 ‘실력’과 ‘성공’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의 학생들은 두들겨 맞고 인격적인 모욕을 당해도 플래처 교수 ‘슬하’에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성공’으로 가는 첩경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승 플래처를 견디면서 자기들도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권위로 치장한 폭력에 굴종하는 것은 또다른 폭력을 잉태한다는 단순한 인과. 그리고 폭력의 순환을 ‘귄위’라고 여기게 하는 사회.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런 상황은 정상이 아니며 그런 폭력과 그 폭력을 묵인하며 재생산하는 사회의 비정상성을 지적한다. 학교의 관계자는 플래처 교수의 옛제자가 자살한 사건을 앤드류에게 알려주며 플래처의 학대를 고발하도록 한다. 이 장면은 그동안 플래처와 앤드류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 관계가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던 영화적 시선을 환기해 관객들에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해준다. 결국 플래처의 교육이 교수직을 잃을 만큼 반사회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Commentary02  ‘권위주의’라는 권위

그런데 관객들은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플래처 교수의 열정을 부러 애써 느낀다. 사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많은 수의 관객들은 (특히 한국의 관객들은) 플래처의 교육법 따위는 폭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을만큼 폭력적인 교육환경에서 자라온 피해자들이다. ‘사랑의 매’ 같은 모순의 언어가 팽배한 교실에 살았고, 이름대신 성적으로 호명되는 삶을 살았다. 대학의 서열에 따라 인생의 등급이 낙인찍히고, 취업한 회사의 시가총액으로 인격의 경중을 가늠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런 이들이 플래처 교수의 교육법을 보면서 ‘제자의 가능성을 위한 필요악의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끔찍한 일이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교육법으로 이전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간 남자를 진정한 스승으로 여기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플래처의 교육법에 열정이니 애정이니 하는 말을 붙이며 ‘사랑의 매’, ‘체벌’, ‘훈육’같은 말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너무 많다는 사실.

‘권위주의’는 권위에 굴종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한국사회 (비단 한국사회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는 권위에 순종하며 언젠가는 자신이 권위를 갖게 되는 순간을 갈망하는 삶의 태도를 ‘철이든다’고 표현한다. 권위주의적 삶의 태도가 ‘권위’를 가진 셈이다.

다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기의 폭력을 고발한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한 무대로 플래처는 큰 무대를 준비한다. 그리곤 앤드류에게 일부러 틀린 악보를 준다. 당황한 앤드류를 보면서 모욕적 언사를 내뱉는 플래처의 복수. 그런데 앤드류의 당황은 잠시. 앤드류는 플래처의 함정에서 오히려 자기가 연습했던 곡을 소신껏 연주해내며 상황을 이겨낸다. 그리고 앤드류와 플래쳐가 서로를 보며 짓는 미소. 플래처는 마치 자기의 가르침을 마침내 이해한 제자의 성장을 뿌듯해하는 것처럼 보이고, 앤드류는 스승의 의도를 이제야 알아챈 제자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졸한 사적 복수는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 앤드류로 인해 고매한 교육자의 뜻으로 격상된다.

앤드류와 플래처가 마침내 공명한 것이라고 해도 이는 앤드류가 플래처의 폭력적인 세계에 다시 빠져 들어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플래처의 권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영화는 그 무대 이후를 보여주지 않지만 어쩌면 그 날 이후 앤드류는 플래처에게 더 심한 학대를 당하는 학생으로, 그리고 주변에게 그 폭력을 전염시키는 가해자로 살아가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Commentary03  전염

권위는 결국 사회적 합의에 의해 생성된다. 그 사회의 크기는 상관없다. 사회의 지향과 욕망에 따라 무엇을 좇느냐가 권위를 결정한다. 그래서 권위주의는 전염된다. 권위에 순종하는 것으로 자기의 욕망을 해소하려는 태도가 곧 권위주의기 때문이다. 권위에 가까이 다가가는 누구를 지켜보는 일. <위플래쉬>의 플래처는 그 권위주의의 전염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의 학생들이 조바심을 내도록 하고, 그들의 욕망을 단순화 시키고, 그 단순한 욕망이 촉발한 조바심 위에 군림한다. 권위는 강고해지고, 그의 권위에 굴종하는 문화는 다시 사회를 지탱하는 권위가 된다. 그리고 이내 그 권위는 주변을 전염시키고, 더욱 강력한 권위가 된다. 할 일은 순종밖에 남지 않는다.

고민해 볼 일이다. 당신이 순종하는 권위는 무엇인가. 당신의 플래처는 누구인가. 당신은 그를 ‘참된 스승’같은 말로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갖고 싶은 권위는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누구에게 순종을 강요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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